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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형제자매들.

나의 외가.

by 그레이스 ~ 2020. 11. 17.

외가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분이 댓글을 남겨줘서

무척 놀라고 반가웠다.

우리 외갓집을 기억하는 사람을 블로그에서 만나다니~!!

덕분에

온갖 기억들이 뒤 엉겨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추억여행을 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아버지가 외아들이어서 삼촌도 없고 고모도 없으니

이모와 4명의 외삼촌들과 특별히 가까웠으나

엄마가 사고로 42세에 돌아가신 이후로는 서서히 외가와 멀어져서

내가 기억하는 외가는 20세 이전으로 머물러 있다.

 

외할아버지는 삼 형제 중 장남으로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가셔서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아 부자로 살았으나

집을 떠날 수도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묶여 있는 삶이어서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 많으셨다.

외할아버지의 두 동생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서

막내 외할아버지는 영문과를 나와

부산에서 초기에는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하다가 대학교수가 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45년 음력 1월에 결혼하셨는데,

외할아버지는  38세에 장인이 되셨다

내 생각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청년이어서  점수를 더 주었을 것 같다.

 

외할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하거나 설거지는 평생 안 하셨는데,

별식을 만드는 솜씨는 뛰어나서

기별도 없이 가는 날도 즉석에서 별별 음식을 다 만들어 주셨다고

아버지는 외할머니 음식 솜씨에 감탄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방학에 외가에 가면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음식과

명절이 아니어도 떡과 유과를 만들어 주셨다.

 

평탄한 날이 이어졌으나

1960년 전후에 서울에서 내려온 도박꾼들이 외가 사랑채에 손님으로 와서

며칠 지내면서 외할아버지를 화투에 흥미를 가지게 유혹해서...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왔던 그 남정네에게

200석 쌀농사 논 문서가 하룻밤에 몇 장씩 넘어갔단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엄마는 통곡을 하고...

(우리 형제들이 지금까지 명절에 모여서 고스톱은커녕 화투가 화제에 오르지도 않는 이유다)

 

장녀의 말은 들으셨던 외할아버지께

살림의 규모를 줄이고 집 바깥의 빈터에 방앗간을 차려서 생활수단을 삼으라고...

내가 육 학년이었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평생 일이라고는 안 해보셨던 분이 정미소 주인이 된 사연이다.

 

살림이 줄어들어서 일하는 사람을 두고 살 정도가 아니었으나

외할머니는 청소하고 부엌일 하는 건 끔찍이 싫어하셔서

시골에서도 일하는 아이는 두고 사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89세의 이모님이 올해 돌아가셔서

남동생 4명과 여동생까지... 어머니의 형제들 모두 떠나셨다.

올해  93세이었을 엄마는

51년 전에 먼저 가서 동생들을 기다리다 만났겠다.

 

 

송선생님~

참으로 오랫만에 외갓집 생각을 했습니다.
열살무렵에 사랑채 일꾼방에 아저씨들이 나무를 깎아서 장난감도 만들어주고,
어두워지면 자고있던 참새를 잡아 구워주기도 했어요.
먹거리가 풍부하고 오빠와 삼촌들이 재미있는 일,
신나는 사고를 많이 쳐서... 추억이 방울방울입니다.

키미2020.11.17 16:04 신고

어머...제가 좋아하는 옛 이야기들.
참 재미납니다.

  • 그레이스2020.11.17 17:19

    어느 몰락한 양반 이야기중에 나올법하지요?
    마을사람들이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도도한 마나님이었을 겁니다.
    우리 친할머니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무명치마 뒤집어서 손주 콧물도 닦아주시던 친할머니와
    치마에 오줌 묻을까봐 아기를 안아주지도 않았던 외할머니가
    어린 나의 눈에도 비교될 수밖에 없잖아요

  • 키미2020.11.17 19:26 신고

    와~!! 전형적인 양반집 마나님이시네요.
    대단하시다. ㅎㅎ

  • 최차임2020.11.17 20:10 신고

    유년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사연들이 생각나 놀랍고 재미있습니다.막내 외삼촌 분 이름에 규자가 있어 규산? 이라 불리던 분이 생각나 퍼즐을 맞췄습니다
    외가댁은 요즘 남아있는 고택처럼 크고 좋은 기와집이었고 뒷산에 밭들은 거의 그댁 소유였어요. 저는 그댁에는 한두번 심부름 갔던 기억밖에 없으나 어른들이 곡목 (골목인줄 알았어요 ㅋㅋ) 아지매 어흠하는 양반놀음 수군대는 것같은 얘기를 들었어요~~그리고 용동의 어떤 총각이 일하던 언니를 그댁 자제인 줄 알고 장가들었다 복잡하게 되었다는 혼사 얘기 등이 생각나 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 없어져 버린 고향마을얘기 정겹습니다. 그 마을에 사시던 분들이 경남도청이 오게되어 다 떠나고 저 또한 결혼과 직장으로 떠나온 나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었습니다~~

    • 그레이스2020.11.17 20:35

      집이 망해서 예전의 위엄이 없어졌는데도
      외할머니는 어험하는 양반놀음을 계속했을 겁니다 ㅎㅎ
      그리하고도 남을 어른이지요.

      맹년이가 밖에 나가서 자기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외할아버지의 늦둥이 딸이라고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애는 참 불쌍한 아이에요.
      나와 동갑인데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남의집살이를 시작했고
      가을이 되면 맹년이 아버지가 1년치 월급을 받으러 왔었어요.
      해마다 월급을 다 받아갔으니
      맹년이가 결혼할 때는 외할머니가 딸 시집보내는 만큼 혼수를 해줬다더니...
      딸 하나 낳고 이혼했다는 말은 내가 울산 사택에 살 때 들었어요.

      창원시가 생긴다는 정보를 몇몇 서울사람들이 먼저 알고 땅을 사러와서
      시세보다 비싸게 사겠다는 말에 외할아버지도 남아있던 야산을 전부 파셨다 들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몇 배나 올랐더라 하고요.
      외가의 흔적들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 최차임2020.11.17 20:12 신고

    다음 홈페이지에서 닉네임 변경했는데도 실명이 나와 당황됩니다. 연구해봐야겠어요~~ 

    • 그레이스2020.11.17 20:48

      이상하다~?
      나는 실명을 그레이스로 바꿔서 저렇게 나오거던요 

  • 여름하늘2020.11.17 23:36 신고

    두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듣고 있으니
    마치 그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듯한 느낌이 드네요
    소설을 읽고 있는 기분도 들고요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시니
    어머니를 뵌듯한 설레이는 기분이셨을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 외가집의 아름다운 추억이네용~ 가세가 기울어졌음에도 정미소와 방앗간을 운영하셨다면 그래도 동네 유지로 사셨을것 같아용~
    저는 외갓집에 대한 추억은 거의없네용.. 엄마가 막내였고 종갓집 큰 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저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이있어용~
    방학때 한달씩 할머니집에 있으면서 맛있는 과일도 많이 먹고 할머니따라 할머니 친정에도 여러번 갔었어요~ 친정에 갈때마다 시골집에 가 보면 할머니생각이 간절합니당~

    • 그레이스2020.11.18 07:37

      방앗간에서는 고추도 빻고 떡도 하고 그렇잖아.
      정확하게 말하면 나락으로 쌀만 빻는 정미소야
      그동네에 정미소가 없었으니 다행이었지
      평생 노동을 안해봤으니 몇마지기 남은 논농사도 남의 손을 빌려서 지으셨어
      우리 외할머니는 참...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기가 막히는 에피소드가 많다
      소득이 좋다는 남의 말만 듣고,
      도라지를 어마무시하게 많이 심어서 수확할 엄두도 못내고 진해에서 상인이 와서 인부를 고용해서 캐가는 방식으로 팔았으니 뭐가 남겠냐?
      어느 해는 고구마를 어마무시하게 심어서 인부를 동원해서 100가마 넘게 캤다
      그 걸 한꺼번에 상인에게 팔아야 하는데 원가가 안되는 헐값에 안팔고 창고에 뒀더니 썩어서 난리가 나고...
      농사 상식도 없이 농사를 지으시니 우리엄마는 속이 터져서 죽겠다고 푸념하고...

  • 앤드류 엄마2020.11.19 12:33 신고

    외가 동네에서 나고 자란분을 블로그에서 만나셨다니 많이 반가왔겠습니다.
    세상은 넓지만, 블로그 세상은 넓고도 좁은것 같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동생들처럼 공부를 하셨더라면 도박꾼의 꾐에 빠지지 않으셨을텐데...
    장녀셨던 그레이스님 어머님이 친정일로 많이 속상해하셨겠어요.
    평생 일을 하지 않으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정미소를 하시면서 본인 탓을 많이 하셨을듯.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 지네요.

    • 그레이스2020.11.19 14:14

      외가의 숨기고싶은 치부를 공개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마음이 무거워요.

  • 최차임2020.11.19 14:46 신고

    댓글 실명문제 해결 못하여 쪼끔은 불편하지만~ 오늘은 비바람이 심하여 밖에 못나가고 그레이스님과 함께 추억여행~~ 그레이스님의 외가이자 저의 고향 마을은 얕으막한 뒷산을 등에 업고 남으로 향한 참 따뜻한 동네였어요. 외가댁 큰기와집 옆으로 이씨성 4집 . 대밭 뒷쪽 몰락해 가던 김씨성받이 큰 기와집 또 대밭옆으로 새마을 지붕개량으로 지붕만 기와로 바꾼 최씨 3집이 있었는데.. 물이 귀한 편이라 외갓댁 배꾸마당 우물과 최씨네가 사용하던 우물가 얘기들도 재미있었어요.물동이로 머리에 물이어다 먹던 시절 같은 새미물 먹는 집끼리 이웃사촌이었는데 사이가 나빠 가까운 곳두고 먼곳 새미를 사용하던 집안도 있었거든요.그 시절 시골사람들도 참..ㅎㅎㅎ 도라지얘기도 아시는 것보면 외가어른들 늘 염려하고 걱정하신것같아요. 동네 집들은 도라지 농사 많이 지었고 저의 집도 논농사보다 도라지 팔아 애들 교육비와 가용돈으로 많이 썼어요. 저도 도라지껍질 벗기는 선수입니다. 부모님 많이 도와 드렸거든요. 그시절 농촌에는 참 살기 힘들었어요..검은 액체를 품어대며 통통통 큰소리를 내던 동력기 .벨트에 걸려 돌아가던 방앗간 기계들 엔지니어이셨던 골목어른 어느날 방앗간이 뜯기고 그자리는 밭이되고 건너마을 사람이 이사와 집을 짓고.... 그시절 그 아지매들 들마당에 놀던 아이들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요???

    • 그레이스2020.11.19 15:47
      여기도 비바람이 심하네요
      과거로 추억여행을 하기 딱 좋은 날이예요~ㅎㅎ
      외가 옆 이씨 성 아재는
      외할아버지와 촌수가 먼 친척인데 땅을 주고 이사 오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담장에 작은 쪽문을 만들어서 수시로 왔다갔다 했어요.
      나는 외가에 가더라도 대밭 뒷쪽으로는 안가봤는지
      집들과 골목을 기억을 못합니다.
      도라지는 앞산 비탈 그 넓은 밭에 끝이 안보이게 심으셨던 거예요.
      내가 갔던 날은
      그 넓은 밭에 도라지꽃이 만발했습디다
      도라지꽃에 마음을 빼앗겨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어요
      외할머니는 인부들 구해서 밭메고 약치고... 밭띠기로 팔아서 이익은 커녕 적자 났었대요.
      엄마는 할머니가 농사 지으시는 것마다 적자였다고 한숨을 쉬셨어요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외가에 가는 게 일년에 몇 번 아니어서
      기억들이 조각조각 파편으로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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