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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형제자매들.

귀락당 췌언에 썼던 글

by 그레이스 ~ 2021. 1. 28.

어제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보니

예전 글 중에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찾아보려고,

귀락당 췌언을 다시 읽었다.

 

아버지께서 봄에 식도암 수술을 하시고,

큰 노트에 귀락당 췌언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가문의 뿌리에 대하여,그리고 어린시절부터 살아오신 기록을 정리하셨다.

제목을 그렇게 정한 이유도 설명하시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오빠가 우리들 성장과정과 가족사까지 첨부하고

부모님을 추억하는 형제자매들의 글을 더하여

아버지 돌아가신지 10년 되는 2017년 가을에 문집을 냈었다.

 

 

내가 썼던 몇 편의 글중에 아버지의 사진이 있는 

"아버지의 메모습관" 이라는 글이다.

58세에도 잘 생긴 아버지 모습을 보니

외할아버지께서 총각 얼굴이나 보자고 불러서 대문에 들어서던 청년을

안채 부엌문 뒤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다던 엄마의 말이 생각난다.

스무살의 청년은 얼마나 훤칠했을꼬~

 

..........................................................

 

아버지께서 83년 7월 26일 영국 도착하셨다는 것도

이번에 사진을 보고 알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7월말이라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30일간 계시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한국으로 가시기 전에 현상을 해서 드렸는데,

일일이 수첩에 메모하셨던 내용과 사진을 대조해서 다시 사진뒷면에 기록하셨다.

그당시에는 내가 옆에서 설명을 해드렸는데,

지금은 사진을 봐도 어딘지 모르는 게 많아서 뒷면의 설명을 읽고 아하~ 하면서 놀란다.

 

 

옥스포드 대학 도서관앞의 주점.

조용한 분위기, 같은 방안에 똑같은 카운터가 또 있음.

(이라고 써 놓으셨는데 나는 그 자체가 기억에 없다.)

 

 

 

이 사진 뒤에는,

주점앞 - 한잔하고 나오다 문앞에서 마시고 있는 대학생들을 만나 또 같이 한잔.

(이라고 적으셨다.)

이런 기록이 있어서,사진을 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83년 8월 6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소설속 히스꽃이 만발한 언덕과 모델이 되었던 집을 보러가는 길에

하룻밤 묵었던 B&B에서 아침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결혼한지 1년 된 젊은부부가 살림가구를 갖추기 위해 민박을 시작했다고

자기들 소개를 했던 모양이다.

새댁이 수줍어하면서 식사시중을 해줬다고.

1박과 아침식사에

어른 7파운드 아이 3파운드.

음식 내용과 1파운드는 1200원이라는 것도 적으셨다.

 

 

위의 사진은 아버지 카메라에 찍으셨던 모양이다.

나에게는 생소한 사진이다.(그당시 나에게는 평범한 것이어서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었겠지)

83년 7월 31일.

워윅성

지하 화장실 손 말리는 곳.

화장실에서 용변후 손을 씻고 이 기게 앞에 서서 페달을 밟으면 더운 바람이 나와서

손을 말리게 되어있음.

800년이 넘은 고성의 화장실에 현대시설을 갖추어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

참 부럽다.

 

아래 사진 역시 아버지 카메라에 있던 사진.

83년 8월 1일.

세훈이 유치원.

방학중이라 학교 관리자만 있고 교직원은 없음.(이라고 써있다)

 

 

아이들 집옆의 탬즈강.

강에 갑문 장치가 되어 있어 상류까지 유람선이 다니겠끔 되어 있음.

(우리동네 바로 옆이어서 자주 산책 다니는 곳이다. 동네 구경을 나왔던 날이었나 보다)

 

 

야외에서 밥해먹은 여러날중에,사진만으로는 어디인지 가늠도 안되는데,

뒷면의 적어놓으신,

83. 8.3

워본 사파리.

점심식사준비

입구에서 정문 매표소까지 자동차로 20분,넓이 약 600만평.

안에 케이블 웨이도 있음

(덕분에 워본 사파리라는 걸 알았다)

 

 

사진만 보고도 어디인지 알 수있는,유명장소의 기념사진보다

아버지의 메모 덕분에,

이렇듯 소소한 사진들이 더 반갑고,추억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3년 전에, 아이들이 나오는 사진들, 모두 년도별로 분류하고,

새로 사진첩을 만들어

명훈이 세훈이에게 보냈기 때문에 집에 사진이 없는 탓도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에는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메모가 된 아버지의 사진첩이 필요했다.

사진첩이 붙이는 접착식이 아니고 포켓식으로 되어서,

뒷면의 글이 하나도 손상이 안되어 ,

얼마나 감사한지...

 

 

  • 훤칠하신 아버님과 멋쟁이 그레이스님..두 아드님들.
    사진이 먼 옛날로 데려가네요.
    진짜 생생한 설명입니다.
    사진과 설명을 보니 저도 옥스포드 갔던 기억이 나네요.
    영국에서의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 참 아쉽습니다.

    • 그레이스2021.01.28 13:17

      58세 아버지와 33세의 내모습을 보니...
      그 해의 여름이 영화처럼 펼쳐지네요.
      1926년생 옛날분인데
      180센티의 키에 미남이셔서 어디를 가나 눈에 확 띄는 분이셨어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런던에 오셨어요.
      83년에는 외국여행 자유화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회사 출장이나 초청이 아니면 외국 나가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었잖아요.
      30일간의 영국여행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지...
      교장단 모임이 있을 때마다 런던 이야기를 하셨다고... 여동생이 전해줬어요.

  • 여름하늘2021.01.28 11:43 신고

    아버님께서 정말 훤칠하시고 멋쟁이시며 훌륭하시네요
    남겨놓으신 아버님의 필체를 보는것 만으로도 감동이실것 같습니다
    엣시절의 사진을 보시면서 아버님의 메모를 보시면서
    옛생각에 잠기셨을것 같아요
    추억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참 좋으시지요?
    제가 그 심정을 잘 알것 같아서 자신감있게 여쭙고 있는것이지요 ㅎ
    83년 7월
    800년이 넘는 고성의 화장실에서 손말리는 현대식 시설
    참 부럽다
    하신 메모가 참 인상적입니다
    재작년에 영국에서의 일들이 떠올라 공감이 가는 부분이라서요

    • 그레이스2021.01.28 13:27

      형제자매들이 아버지에 관한 서로의 기억을 글로 써서 공유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건도 생각해 내고...
      문집을 준비하던 몇개월동안 날마다 새로운 글을 올리고...
      그런 감정을 나누다 보니 형제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집디다.

      아버지와 한달간 여행 다닌 곳이 많아서 영국에서의 사진이 백장도 넘어요
      따뜻하고 그리운... 옛 시절입니다.

  • daijb212021.01.28 22:52 신고

    그레이스님!
    빛나는 젊음이 함께 하던 시절!
    멋진 아버님과의 추억을 되돌려 보며 기쁨과 그리움을 함께 느꼈을 것 같아요. 오늘이 살아 있는 날 중의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니 매일매일, 순간순간 행복하게 보내셔요!

    • 그레이스2021.01.29 10:42

      고맙습니다~^^
      어제는 옛 사진을 찾아보면서 추억에 빠졌던 날이었어요

  • Silky2021.01.29 00:18 신고

    블친 블로그에 올리신 그레이스님의 성실한 댓글을 보고 건너 건너 들어와서 눈팅만 하고 갈 때 부터 이미,
    그레이스 님의 삶의 태도에서 보여지는 합리적 이성의 근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길래,어떠한 경우에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언을 그리도 다양하고 정의롭게 하 실 수 있을까?
    그러한 삶의 철학과 태도가 내재해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의 삶에서도 스스로 만족해 하며, 감사할 수 있을 만큼 구현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동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삶이 당대의 본인의 내공 만으로도 가능할까 ?

    저의 못 말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 천국차원에서 염치 없이 들락거리다 보니
    궁금증 해결의 힌트를 이번에는 남달리 훌륭하신 친정아버님의 금수저 가계에서 찾아보게 되는 군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는 부모자식관계!
    일찍 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야 평생의 한처럼 남아계시겠지만, 무한한 사랑으로 보듬어 주신 할머님이 대신 충분히 장수하셨고,
    참으로 멋진 풍모에 평생을 청년 교육자의 수장으로 건강하게 은퇴하신 친정아버님의 장녀이셨던 그레이스 님의 업이자 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가족관계에서는 엄마 부재시에 장녀가 그 역할을 대신 하게되지요. "맏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은 제 경우에는 100% 현실이기도 하구요.
    지금도 이곳 독일, 본에서 같이 살고 있는 맏딸은 어릴 때 부터 제 부재시엔 항상 동생들을 아주 책임있게 합리적으로 돌봐 준 것은 물론이고, 특히 9살 연하의 막내 남 동생은 저 보다도 더 한~ 사랑으로 이 애가 다 커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할 때도, 큰 딸은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면서 독일어 대입시험 준비를 도와주러 방학동안 독일어 강습을 해주기도 하고, 그후로도 암튼 경제적으로도, 또 대학생활을 위한 여러 면에서도 막대한 도움을 주곤 했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맏 딸이 결혼할 생각을 안하고, 부모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상황도 친정, 시댁의 어머님들의 도움없이 홀로 애들을 돌봐야 할 상황에서 어릴 때 부터 너무 일찍 동생들을 돌보게 했던 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 회한이 있긴 합니다.

    • 그레이스2021.01.29 10:22

      실키님의 댓글을 읽고,
      한동안... 옛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19세 여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24세 가을에 결혼했어요.
      그당시 제 생각으로는 엄마가 안계시는 집 딸이니,
      결혼이 늦어지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나와 여동생은 25세 이전에 꼭 결혼해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연애하던 남자가 아니면 중매로 결혼하더라도 25세는 넘기지 않겠다고요.
      여동생 둘 에게도,
      우리는 엄마가 안계시니 가장 이뿌고 인기 많을 때 결혼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당부를 하고요.
      여러가지 가정상황으로 제가 일찍 철이 들었던 셈이예요.
      제가 결혼한 이후에는
      여동생의 혼수장만을 위한 계를 들고...
      엄마가 딸을 위한 준비를 하듯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맏딸들은 동생들을 챙기면서... 부모님을 도우면서... 살 잖아요?
      큰따님이 콜럼비아 대학원을 다녔다는 말씀에... 작은 꼬투리도 엮어 봅니다,ㅎㅎ
      저희 큰며느리도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했어요

    • 그레이스2021.01.29 11:44

      저와 동생들 결혼을 생각해보니... 여동생도 저의 결혼에 자극 받아서
      남편감을 심사숙고해서 연애를 했는데,
      총각의 아버지는 일본 유명대학 유학을 하셨고 어머니는 1940년대 초에 숙명여전을 졸업한 인테리 부모셨어요.
      형님은 서울공대 수석입학한 재원이고 총각 본인도 서울공대 졸업했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기우는 형편이라서... 스물아홉살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뜻밖에도 총각의 형님께서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보겠다고...
      저를 만나겠다고 연락을 주셨어요.
      총각의 형님은 남편의 2년 선배가 되고 총각은 저희 남편의 8년 후배가 되고...
      그 형님과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려서 결혼 날짜를 정하게 되었어요.
      제가 일찍 결혼해서 잘 사는 모습이 동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동생의 결혼조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어요.

  • Silky2021.01.29 23:31 신고

    지금 금방 위의 댓글을 읽으면서 또 다시 뭉클~ 하며 감탄의 한숨이 절로 터 집니다
    "나와 여동생은 25세 이전에 꼭 결혼해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엄마가 안계시니 가장 이뿌고 인기 많을 때 결혼해야 한다고"
    어찌 그 나이에 그리도 현명한 생각을 하실 수 있었는지?
    제 경험에 아무리 미추어 보아도 도저히 그레이스 님의 사고의 영역(깊이와 넓이)을 가늠하기 힘들군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저는 딸이 셋이나 되는 딸 부자 엄마인데도 제 딸 결혼을 위한 혼수 준비엔 관심도 없었거든요? 하물며 "여동생의 혼수장만을 위한 계" 를 들었다는 그레이스님의 신혼기?
    저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동생을 위한 <친정 엄마의 마음>이 오히려 엄마보다도 더 그대로 언니에게 각인되어 실천에 옮길 수 있었을까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울 딸들의 결혼 적령기에 미쳐 도달하기 전에, 둘째가 먼저 신랑감을 소개하겠다 했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은 해봅니다. 차차 아시게 되겠지만, 제 삶은 제가 생각해보아도, 항상 닥치는 일 해결에 급급하며 살아오다 보니
    뭔가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설계를 해서 단계별로 착착 진행되어진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레이스 님께 경이에 가까운 탐구심이 발생하는 것도
    어찌그리 삶의 모든 방면을 미리 준비하고, 공부하고, 다져서 복습하면서, 게획대로 목표를 달성하시는지 ?
    참으로 보기 드물게 삶의 여정을 본인의 의지대로 가꾸어 가고 계신 분의 모범, 더 나아가 전범이라 생각되기 때문 이랍니다.

    • 그레이스2021.01.30 07:06

      이렇게나 칭찬을 하시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갑자기 나빠진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본능 아니었을까요?

      일찍 엄마의 죽음을 겪고는,
      준비하는 버릇은 더욱 철저해져서...
      첫아이 낳으러 병원 가면서,
      만약에 경우 집에 못돌아 올 수도 있다고
      장농속 옷을 정리해놓고
      가계부와 기록들 화장대 위에 챙겨놓고 병원에 갔어요.
      그 후로도 외출을 할 때는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고
      속옷을 새것으로 갈아입고 나가고요.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다보니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남편과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 되었을 겁니다
      30대 이후 나중에는 그게 습관이 되었고요.

  • Silky2021.01.30 00:51 신고

    아! 참, 제 딸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유럽지역 경제학 전공으로 MA 를,
    다시 Columbia 대의 SIPA 애서 국제경제정책으로 두번째 MA 를 취득했답니다.
    그동안 국제 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기회재정부 서기관 대우로
    이곳 Bonn 소재 유엔 기후사무국에서2년간 파견나와 있습니다.
    같이 있는 저는 제2의 고향같은 독일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길 수 있어 좋긴 한데,
    수두룩한 조카들에 빠져서 화상대화로 예뻐하는 모습을 보자니 고연히 짠~해지는 마음 숨기기 어렵군요.

    • 그레이스2021.01.30 07:20

      실키님께서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니, 요즘 고향에 돌아 온 듯 하시겠어요

      큰따님의 비혼이 엄마에게는 아쉬울 수 있겠으나...
      결혼을 안해서... 더욱 빛나게 역량을 발휘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 Silky2021.01.30 16:12 신고

    네, 그런 면으로 그나마 위로를 삼기도 하지요.
    요즘은 우리 때와 달라 아이들 육아를 사회에서 책임 지는 부문이 많아졌음에도
    젊은 부부들이 육아 및 양가의 문화차이로 인한 부부관계 파탄이 어찌 그리 많아지는지?
    달라진 여성의 위상의 부작용? 일 수도 있겠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길들여진 우리나라 여성의 특기인 참을성을 굳이 키워주려 하지 않는
    어머니들의 훈육법도 한 역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서른이 넘은 둘째 딸이 신랑감을 데려 온다 할 때, 뭐~ "언니도 아직인데, 벌써 뭔 결혼이니? 좀더 직장도 경륜을 쌓고,대학원 논문도 끝내고 해도 되지 않니?" 하며 탐탁치 않아 했었거든요.
    저 때도 당시로는 꽤 늦은 올드 미스였고, 대학원 마치고 잘 나가는 외국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둘째오빠 따라서, 결혼 보다는 유학 준비에 골몰 하고 있었지요!

    • 그레이스2021.01.30 17:47

      자녀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맏이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고요.
      평소에 자주 하는 대화의 내용과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는지...
      저희 아들들은 부모가 하는 대화의 내용을... 비판하면서도 닮아가더라구요.
      배우자를 잘 만나서 화목하고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인생 최대의 성공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야망이 그렇게 소박하면 어쩌냐고 말도 안된다고 웃던 아이들이
      30세가 넘어가고 적령기가 되니까
      아버지 말씀을 종종 떠올리게 된다고 하더군요.
      중학생이면 그 시기에 필요한 것을 하고
      고등학생이면 그 시기에 필요한 것을 해야 하듯이
      결혼도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고...
      인생 최대의 결정이라고 하면서 채근을 많이 했었거던요.

      실키님의 공부에 대한 열망을
      큰따님도 무의식중에 닮아갔나 봅니다

  • Silky2021.01.30 20:37 신고

    항상 성실한 자세로 이렇게 많이 올라 오는 댓글에 더~더욱 성실하게 올려주시는 님의 댓글 내용은 물론,
    그러한 모든 삶의 자세로 부터 은근하게, 하지만 강하게 피어오르는 향기^^에 취해, 마음이 많이 움직여 지는 군요.
    제겐 참으로 경이로운 분이십니다.

  • Silky2021.01.30 20:43 신고

    각설하고 처음부터 궁금증이 발동 했었는데, 이제야 물어 봅니다. ㅎ..
    <귀락당 췌언> 의 연원은 어찌 되는지요?
    귀하고 안락한 집의 당호는 짐작이 가는데, "췌" 자에서 막힙니다. ㅉㅉ..

    • 그레이스2021.01.30 21:55

      아버지께서
      인간의 희노애락중에서 노와 애를 빼면 희락인데,
      '희'를 '귀'와 바꾸어 귀락당으로 하셨답니다
      다른 의미로는 중국의 정나라(우리 성씨의 시조) 특산물이 당나귀여서
      정씨 성을 해학으로 놀리거나 풍자할 때 당나귀에 비유했답니다
      귀락당을 꺼꾸로 하면 당나귀가 됩니다.
      아버지는 그런 풍류도 참고하였다고 쓰셨어요
      그리고 '췌언' 은 군더더기말, 안해도 될 말 이라는 뜻입니다.
      옛 선비들이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어 놓을 때,
      겸손의 뜻으로 '췌언' 이라는 말을 제목에 붙였다네요.
      아버지께서도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될
      자신의 살아 온 기록을 남긴다고 그리 쓰셨나 봅니다.

  • Silky2021.01.31 17:08 신고

    아! 당나귀 鄭 씨 이시군요? 아버님의 심오한 삶의철학과 그를 더 윤택하게 하는 해학 까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 셨습니다. 오늘의 님의 모습도 이로 인해 많이 수긍이 가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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