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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형제자매들.

뿌리

by 그레이스 ~ 2019. 12. 30.

 

 

오빠가 형제 단톡방에 올린 글이다.

가문의 뿌리에 대해서 장조카를 포함한 아랫 세대에게 전달하려고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글과 자료를 정리중이라고 한다.

 

 

 

정 3품 선전관 어모장군 안세억공께서 따님을

진주의 가난한 선비 8대조께 시집 보내셨는데 아들 하나 남기고 1699년 병으로 별세하셨다.

어모장군(임금님을 곁에서 지키는 장군)이면

그 위세가 당당하여 진주 목사도 그 아래 배열해야 하는데

진주 가난한 선비를 사위로 볼 때는

그만큼 총명함이 알려져서 혼사를 정한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셨다.

사위가 죽고 탈상 뒤,

가난한 선비집에서 고생하는 따님을 보다 못해 친정 가까운 곳으로 부르셨기에

어린 아들 7대조를 데리고 진주에서 창원으로 옮겼다고 하셨다.

6대조께서 독자

5대조는 형제분이었으나 아들이 없어 동생 장남이 큰집에 입양(4대조)

3대조 독자

그 아래 형제.(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또 딸도 없는 외아들(아버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가계를 보니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아들을 더 낳고싶어 하셨고 손자에 집착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빠와 남동생 둘.

할아버지는 손자가 셋이어서 대가 끊어질 염려는 없겠다고 안심하셨는데...조카가 둘 뿐이다.

장조카는 딸 둘이고, 남동생네 아들은 아직 결혼을 안했으니 

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선조 할아버지들을 보면,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부잣집 따님과 결혼한 경우가 세 분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고 소문이 났으니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셨겠다.

그런데 세 분 다 학문으로는 뛰어났으나 출세는 못하셨다.

 

그레이스2019.12.30 18:24

임진년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가는데,
다른 건 다 두고 족보를 이고 가셨다는 할머니는,
무엇보다 족보가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다.

선조조 기축년 정여립 역모사건(1589년)에
전국 각지의 인재들이 억울하게 연루 되어 1000명이 넘는 선비가 죽음을 당했는데,
진주에 사셨던 수우당 최영경도 무고로 엮이셨다,(1590년)
12대조 석정공께서 수우당 최영경 일당으로 연루되어,
한양 옥에 갇혔으나 생명을 걸고
명문장으로 무고함을 해명하여 대참사를 미연에 막았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가문의 화를 면한 영남 선비들의 칭송을 받았을테고...우리 가문의 모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인데,
그 사건 2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할머니께서는 후손들을 위해서 재산이나 양식보다 족보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셨겠다.
그런 영향으로
후손들은 학문정진에 더 매진하고 선비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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