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양파를 썰다가 검지손가락 첫마디에 칼이 스쳤다
행동이 느려서 미끌하는 순간 얼른 피하 지를 못 한 거지
베이는 것과 살점이 떨어지는 느낌은 달랐다
피가 계속 흐르니 우선 지혈을 시켜야 해서 화장지로 둘둘 말아서 꼭 쥐고 있다가
떼어냄과 동시에 반창고를 붙였으나 피가 멈추지 않아
다시 화장지로 감고 한 손으로 야채를 볶아놓고 나중에 화장지를 벗겨보니
반창고 끝이 피떡이 되어 까맣게 변했다
주부가 부엌일을 하다 보면 이 정도로 작은 사고는 다치는 것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일을 해야 하니 반창고 붙인 다음 의료용 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서 씌우고
방수테이프를 감아 물이 안 들어가게 고정시켜서 찌개도 끓이고 설거지도 한다
피에 흥건히 젖은 휴지를 치우다가 옛 일이 떠올랐다
런던에서 살았던 1981 년 가을부터 1984 년 가을까지의 기간에는
첫 해를 빼고, 다음 해부터는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는 회사 손님이 많아서
오죽했으면 직원들 사이에서 우리 집을 리치먼드 식당이라고 불렀단다
그 손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출장 온 분들이라서 흔쾌히 접대를 했었다
런던에서 노르웨이로 덴마크로 출장 많이 가는 남편이
적은 출장비에 맞춰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은 걸 알기에
한국에서 출장 온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다
(출장 온 분들 말고도 친목차원에서 런던생활을 시작하는 직원 가족도 자주 초대했다)
2~3 일 후에 식사초대를 한다는 식으로 여유를 주면 좋은데
한 번은 자동차로 히드로 공항에 마중을 갔다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일주일간 업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온 울산의 출장팀 세 분이
너무나 밥하고 김치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고(그 당시 런던에서 한국식당은 많이 비쌌다)
남편이 공항에서 곧바로 우리 집으로 가도 되겠냐는
부탁이 아니라 애원하는 듯이 전화를 했다
한 시간 이내 가능한 메뉴를 생각하고 냉동실에서 꽝꽝 언 고기 덩어리를 꺼내 자르다가
칼이 손바닥에 꽂혀 버렸다
피가 쏟아지는 상태가 심상치 않았으나 우선 음식을 만드는 게 더 급하니
마음이 너무 급해서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손이 아픈 줄도 몰랐다
삼십 대 젊은 나이라서 손이 빨라,
그 와중에도 큰새우와 오징어가 들어간 얼큰한 해물잡탕과 손질해서 넣어 둔 해파리로 냉채를 만들었다
손은 다음날 동네 보건소에 가서 치료를 했었고
밤에 자기 전에 반창고를 교체하고
아침에는 다시 의료용 장갑 손가락을 잘라 둔 것으로 씌우고 방수테이프를 몇 바퀴 두른다
추가,
1980년대에 대기업에서 외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이 같이 나가서 생활했던 경우에는
특히나 미국 영국처럼 선진국이었을 경우는
아이들 다 데리고 외국에 나가서 사는 자체만으로도 큰 혜택이라 생각해서
부인들은 대부분,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한국과 영국의 민간 교류에 필요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아이들에게 한글과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는 한글학교(매주 토요일)에도
교사로 참여하거나 행사에 협조하는 식으로 활동했다
한국 본사에서 출장 나오는 분들에게도,
그분들의 바쁜 업무 중에 시간 짬을 내어
저녁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도, 어느 집에서나 흔쾌히 했었던 일이다
자재구매 부서에서 나왔을 때는 그 일 담당하는 직원들 집에서 초대하고
영업부서에서 나왔을 때는 또 그쪽 일 담당자 중에서 초대하고
그렇게 런던 지사에 근무하던 모든 직원 집에서 자발적으로 맡았던 일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접대를 많이 했던 이유는
손님 오는 걸 좋아했던 나의 성격 탓도 있겠고,
남편은 기술담당이니 이쪽저쪽으로 다 걸리는 남편의 업무와도 연관이 있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