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친정.형제자매들.

귀락당 췌언 - 6.

by 그레이스 ~ 2017. 10. 27.

 

 

귀락당 췌언에 실린 내 글은,

부모님에 관한 글 다섯 편, 형제자매들 두 편, 할머니에 관한 글 세 편, 외갓집 한 편, 총 11편이다.

그중에 형제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들.

....................................................................................

6. 소소한 기억들.

 

오빠 다음으로 태어난 동생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거의 다 오빠와 연관이 있다.

할머니 댁에서 살았던 4세 5세 시절,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할머니 댁에서 보낸 많은 나날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웃마을까지 뛰어가서 그 댁 허락도 안 받고 삽작문 열고 들어가서 감꽃 주웠던 일과

그걸 굵은 실에 꿰어서 내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던 오빠가 아련하게 기억된다.

목걸이 감꽃을 하나씩 따먹었던 기억도.

다음날이면 또 감꽃을 주우려 갔었지.

 

할매가 무조건 나를 데리고 다니라고 해서, 오빠는 따라다니면 걸리적거린다고 짜증 내기도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심부름도 많이 했었다.

몇 살 때인지 모르겠는데,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너무 많이 타서 옷이 다 젖은 날은

할매한테 혼난다고 모닥불에 말리고 들어가자고 해서,

옷과 양말을 말리다가 나이롱양말 바닥이 홀라당 녹아버려서, 집에 들어갈 걱정이 태산이라,

삽작문앞에서 니가 먼저 들어가라,

오빠가 먼저 들어가라,

서로 밀쳐 넣으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할매한테 들켜서 호되게 야단맞은 일도 큰 사건이다.

 

학교에 다니던 어느 봄 밀수확을 끝내고 쌓아놓은 밀대로 오빠가 집 앞마당에

인디안식 원두막을 만들었는데,동생들은 열심히 밀대단을 나르고, 오빠를 도우면서 흥분했었다.

봄 농번기여서 일주일 휴교였던 때 였을 게다.

그당시는 방학 말고도 농사철에는 집안일 도우라고 일주일씩 학교가 쉬었다.

굳이 원두막에서 밥을 먹겠다고 마루에 차려놓은 밥그릇을 다 들고 나갔었고,

밤에 이불도 들고 나가서 다같이 좁은 원두막에서 잠을 잤었다.

 

가을걷이 끝내고 아랫채 지붕 밑까지 짚단을 쌓아놓았던 즈음에,

동우가  옆집 용성이와 둘이서 짚단 쌓아놓은 옆에서 놀다가 

한단 들고 온 짚단에 손을 쬔다고 성냥으로 불을 피웠단다. 

짚단에 불이 붙자마자 바람에 불똥이 날아가 삽시간에 불이 옮겨붙어 큰불이 되었는데,

마침 어른이 있어서 이집 저집 어른들이 나와 불을 껐다.

하얗게 질린 동우는 용성이가~ 용성이가~ 말만 되풀이 했다.

용성이가 성냥을 가져왔다는 뜻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으로 질려 있어서 그날 크게 야단맞지는 않고

두번다시 성냥 가지고 놀면 안된다고 다짐만 받았다.

밤에 놀라서 오줌도 쌌다.

 

밀대 짚단은 연이도 사연이 있지.

아랫채 군불때는 아궁이는 마루 밑에 있었는데,

밀대를 쌓아놓으니 마루에서 뛰어내리기 딱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뛰어 내리면 밀대의 쿠션으로 쑤욱 꺼졌다가 다시 올아오는 그 재미에 빠져서,

차례대로 한 명씩 뛰어내렸는데,

연이는 마루에서 세게 굴렸던지 몸은 밑으로 떨어졌으나 머리가 밖으로 나가서 이마가 깨졌었다. 

다친 연이 대신, 큰 것들이 호되게 야단맞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마에 흉터가 남았다.

 

불이 났던 것 말고, 용이가 저질렀던 큰일 하나 더,

나이를 계산해보니 내가 직접 본 게 아니고,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던 내용이겠다.

시골에는 아이들 먹을게 별로 없으니, 엿장수가 오는 날은 동네 꼬마들이 다 따라다녔다.

돈으로 엿을 사는 게 아니라, 고물들을 들고 가서 엿을 바꿨는데,

헌 양은그릇, 놋그릇, 녹슨 철물 아니면 유리병이다.

부엌을 다 뒤져봐도 빈 유리병이 없으니, 찬장에 있던 참기름병을 들고 나와

부엌 앞 수채 구녕에 참기름을 쏟고, 그걸 가지고 가서 엿을 바꿔 먹었다.

아마도 연이도 따라갔을 듯.

장날이어서 채소를 이고 팔러 나갔다 오신 할머니,

삽작문 들어서자마자 참기름 냄새가 확 풍기니, 무슨 사달이 났는지 짐작을 하셨을 터. 

오리발이 통할 수가 있나.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들  어렸을 때는 사격장 근처에서 탄피를 주워 돌멩이로 두려려서 껍질만 분리해,

엿 바꿔 먹는 아이들이 많았다.

신촌 앞 논을 가로질러 가면 건너 마을은 가까운 곳에 해병대 훈련소가 있어서 

그 주변의 아이들은 쉽게 주워 올 수 있었겠지.

어느 겨울 방학 할머니 댁에 있을 때였다. 

아이들 여럿명이 둘러앉아 대포 탄피를 두드렸는데, 그게 불발탄이었더란다.

터져서 그 자리에서 즉사한 아이들과 신음하는 아이들.

이쪽 마을에서도 한달음에 달려갔던 어른들이 참혹해서 못 보겠더라고 현장을 본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는 그런 거 보면 안 된다고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다짐 다짐하셔서 나는 안 갔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군부대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움에 떨었다.

 

성주사에서는,

오빠가 5학년 때 실과시간에 버선 만들기를 한다고,

내 발에 맞춰서 본을 뜨고 종이를 잘라서 예쁘게 그림 그리고 색칠해서 버선을 만들어 주더라.

오랫동안 책갈피에 넣어두고 좋아했었다.

내가 순한 편이었고, 오빠 심부름도 잘해서, 그 시절의 오빠는 나를 많이 챙겼었다.

친구 집에 갔다가 얻어온 먹을 것도 집에 가져와서 나를 줬었다.

 

오빠가 수학여행 가는 날.

아니 수학여행 가는 일주일 전부터, 어찌 그리도 설레고 긴장이 되던지...

정작 여행을 가는 오빠보다 내가 더 흥분했었다.

오빠~ 오빠~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전날 밤 여행가방에 엄마가 옷이랑 소지품을 빠짐없이 잘 정리해서 지퍼를 닫아 놨는데,

내가, 그걸 굳이 다시 꺼내서 하나하나 새로 챙겨 넣었다.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오더라.

다 자는 밤에 나 혼자 깨서 오빠 수학여행 떠나는 날을 기다렸으니...

그렇게 수학여행을 간 오빠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돌아왔더라는 슬픈 엔딩으로 끝났다.

 

동우가 1학년에 입학했으니 내가 4학년 때 일이다.(오빠와 나는 7살에 동생들은 8살에 입학)

뛰다가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났었는데,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작은 딱지가 조르르 많이 맺혔다.

완전히 아물어서 닥지가 저절로 떨어져야 하는데,

종종 그걸 못 기다리고 딱지를 떼다가 피가 나기도 하잖아.

내가 그걸 못 참겠더라고.

내 다리에 난 딱지를 떼는 거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동생 다리에 생긴 딱지를 떼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엄마가 못 떼게 하셨고, 용이 본인도 싫어했기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게 생각나서 잠이 안 오는 거라.

살며시 일어나서,

모두 잠든 사이에 용이 다리에 딱지를 손톱으로 살살 하나하나 다 떼어내고 말았다.

다음날 엄마가 알았는지 용이가 뭐라고 했는지 그건 기억에 없다.

 

4,5, 6학년 방학숙제에는 으레 붓글씨와 수채화 그리기가 있었다.

겨울방학도 여름방학도.

개학이 가까워지면, 미루어 뒀던 숙제를 몰아서 했는데,

오빠 옆에서 물을 떠 와서 먹을 갈거나, 수채화용 붓씻는 일은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이었다.

열심히 시중을 들고나면,

오빠가 맘에 드는 거 선택하고 나면, 나머지 중에서 좀 못쓴 거 골라서 내 이름을 써서 가져갔다.

지나고 보니, 그 때문에 내 글씨도 그림솜씨도 형편없는 지경이 되었나 보다.

오빠 옆에서 나도 따라 연습을 했으면, 보통은 되었을 텐데,

구경만 하다가 하나 주워서 숙제라고 내었으니... 참.

오빠는 대회 나가면 항상 상을 받아오는 수준의 붓글씨와 그림 솜씨였기에,

처음 시작하는 내 글씨가 부끄럽고 주눅이 들어서, 옆에서 연습을 하려고 용기를 내 볼 엄두도 안 났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많이 후회되더라.

 

성주사 살 때는 입석아지매집에 소소한 심부름을 많이 다녔는데,

4 5학년 되기 전 어렸을 때는, 어두워지면 무섭다고 오빠와 같이 가라고 해서 함께 다녔다.

오빠는 심심해서 나를 데리고 갔는 듯.

상가가 있는 역전을 지나 기차역을 넘어서 논이 있는 들길로 내려가면,

멀리 비석이 보인다.

나는 꼭 그즈음에서 무서움이 밀려오더라.

놀려먹기를 좋아했던 오빠는 뒤에 서서 왁~! 소리를 내거나

나를 두고 달리기를 해서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철길에 깔려 사람이 죽었다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거나 오싹한 소리도 했었다.

무서워서 허겁지겁 뛰다가 논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거의 육십 년이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고소를 해야겠다.

 

앵두가 익었던 시기에, 오빠와 나 둘이서 할머니 댁에 가던 날.

(그날의 상황을 떠올려보니 동생들은 없었다)

성주사를 떠난 게 5학년 봄이었으니, 4학년 그러니까 10살 때 일이다.

용원역에 내려서 신촌으로 가는 2~3 킬로 길을,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한다.

차라리 나보다 앞서서 가면, 아예 포기하고 조바심을 내지 않을 텐데,

슬며시 뒤처지기도 하고, 양보하는 듯 천천히 걷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열심히 달려서 오빠보다 먼저 할머니 집에 도착하겠다고 욕심을 부린다.

앞서서 뒤돌아 보면, 실실 웃으면서 힘껏 달려서 훌쩍 나보다 앞서간다.

그런 상황을 몇 번 반복하고, 애가 타서 눈물이 나올 정도가 되어서야,

앞서가는 거 없이 똑같이 들어가자고 약속을 해준다.

어느새 신촌 마을 어귀에 들어서고, 묏등 걸을 지나, 집 앞까지는 둘이 똑같이 도착했으나,

삽작문을 들어서자마자 우사인 볼트 같이 뛰어서

부엌을 통과하여 앵두나무에 먼저 가서,

한 줌 입에 넣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 그리도 억울할 수가 없다.

똑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잖은가 말이다.

할매집에 똑같이 도착하는 걸 원했던 게 아니고 앵두나무가 목표였다는 건

오빠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의 이야기.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대학을 졸업한 오빠는 신체검사에서 무급을 받아 다음 해 재검사를 해야 하니까,

병역이 해결 안 된 상태여서 기업체에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임시로 중학교 교사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 하나.

최소한의 잡비를 뺀 월급의 전부를 생활비로 할머니께 드렸던 형편이어서,

변변한 옷이 없었다.

교사생활 2년째였나.

담임을 맡아, 수학여행에 인솔자로 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밤에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학교 교무실인지 하숙집인지)

오빠~ 머 입고 갈 거고?

옷 입고.(앞도 뒤도 없이 옷 입고 한마디에 폭소가 터졌다)

오빠는 순발력 있게 한마디 하는 말로, 유머가 아닌데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이고 참, 옷 입고 가지 벗고 가겠냐고 하고는,

일요일 오동동 사거리에 있는 신사복 매장에 옷 사러 가자고 했다.

맞춤양복이 아닌 즉석에서 양복을 사입을 수 있는 기성복 판매장이 마산에 처음으로 생긴 즈음이다.

브랜드 이름에 미스터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그때 나랑 같이 가서 사 입은 옷이 오빠의 첫 양복이다.

 

내가 진영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기에,

울산에서 오빠가 종종 엽서나 편지를 학교로 보내줬다.

울기등대 가는 길, 들녘에 보리가 파랗다든가, 편지마다 섬세하게 자연을 묘사한 문구가 좋았다.

런던으로 발령이 나서,

이삿짐을 3년간 의령의 아버지 학교 창고에 보관하기로 했었다.

짐 정리를 도와주러 온 올케언니에게,

문갑 속에 있던, 옛날 편지들 중에서 오빠의 엽서와 편지를 보여줬더니,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해서,

에이, 내가 받은 편진데... 망설이다가 , 아쉽지만 양보를 했었다.

그 엽서와 편지들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

 

 

 

'친정.형제자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락당 췌언 - 8.  (0) 2017.11.02
동생이 보내 준 가을 풍경  (0) 2017.10.30
문집 - 귀락당 췌언.  (0) 2017.10.19
오빠의 문자.  (0) 2017.10.17
엄마 기일 (형제모임)  (0) 2017.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