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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형제자매들.

아버지의 눈물

by 그레이스 ~ 2022. 9. 1.

며칠 전에 나의 백강을 읽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하고도 슬펐습니다 

사연에 나온 학교가

진해시에서 10 리 떨어진 시골의 국민학교라 하면 경화 국민학교였을 겁니다 

1950년대 그 당시에는 학교가 많지 않아서요

 

(반에서 가장 가난한 친구가 며칠을 연달아 결석한 후에 학교에 온 날

담임선생님이 그 아이가 결석해서 받지 못했던 분유가루 봉지를 그 아이에게 주셨는데 

반 아이들이 둘러싸고 저마다 손을 벌려 조금 달라고 ...

조금씩 주자니 턱없이 부족하고

욕을 먹더라도 그대로 가지고 집에 가서 동생과 먹고 싶었을 텐데

친구들 등쌀에 한 참을 버티던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그 분유 봉지를 비가 오는 교실 밖으로 던져서 

종이봉지가 터지니 분유가 흰 강물처럼 보였다는...

그날 이후로 영영 학교에 오지 않는 그 친구에게 세월이 가도 미안한 마음이 큰 빚으로 남아 있다는 사연이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 후

형제자매들이 아버지를 추모하는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글과 사진들 살아오신 기록들을 싣고

뒤에는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글을 몇 편씩 써서 넣었어요 

 

 

막내 남동생의 글 중에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분유가루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그 글을 복사해왔어요)

 

아버지는 43세(1968년 ) 봄에 거창군 산골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아 

마산 집을 떠나 그곳으로 가셔야 하는데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엄마가 갈 수 없어서 할머니께서 아들 따라가시면서

적적하실까 봐 아홉 살 막내가 마산에서 시골로 전학을 갑니다

아홉살 아이의 눈으로 본 사연입니다 

 

6 편, 아버지의 눈물

산골의 밤은 무서울 만큼 고요하였다

그런 적막을 깬 것은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우리가 놀라서 나가보니

먼 골짜기에 산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인 세숫대야에 담긴 고구마를 내려놓으며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내용인즉

남편이 오늘내일하는데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고 있다고.

혹시라도 학교의 분유가루라도 얻어다 끓여 먹여보면 어떨까 했다

그 당시는 가난한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들어온 미국의 분유가루 급식이 각 학교마다 있었고 

우리들은 하교할 때마다 한 봉지씩 받았다 

 

한없이 측은해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않고 

그 대야에 학교 창고에 보관 중이던 분유를 수북이 담아 오셔서는

가루가 날아가지 않도록 뭔가로 잘 덮어주셨다

남루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고마워하며 돌아설 때의 그 기쁜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결국 그 아저씨는

그로부터 사흘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후일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우리 집에 인사를 왔다

아버지께 고구마 소쿠리를 건네며,

교장선생님 예~ 그 사람이 난생처음 우유를 먹어봤다 아입니꺼~! 

얼라처럼 그리 맛있다꼬 좋아했심더~  라는 말을 전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늘 강인하고 장군 같았던 그런 아버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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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설명

아버지는 1944년 봄 명치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2차 대전 막바지여서 수업은 한 시간도 못하고 

일본 육군항공본부에 군속으로 입직되어 한 달 후에 남태평양 라바울로 배치된다는 

항공본부의 공문을 받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베에서 도쿄로 무작정 상경하는데

(전시라서 통행증이 없으면 차를 탈수도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고 하니 

걷다가 얻어 타다가 어렵사리 하루에 한 끼 밥을 사 먹고) 고생고생으로 육군항공본부에 갔었답니다

고베에서 걸어서 찾아왔다는 부부가

무매독자 외아들이라고 ...

눈물로 호소하면서 아들만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곧 한국으로 가겠다고...애원해서 

외아들라는 사실 확인 후 대구 비행장으로 배치되었답니다( 1944 년 6 월 즈음)

할아버지 할머니도 급하게 살림을 정리해서 한국으로 나오셨고요

 

대구 비행장 군속에서 곧 사직하고 집에서 놀고 있을 때 

상남 소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다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로 )학생들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말이 서툴러서 학생을 가르치는 건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또 청하셔서 

한편으로는 전쟁 막바지에 다급해진 징집을 피하려고 

가을부터 임시교사로 ... 교직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 다음해 8월에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은 다 떠나고 

남은 한국인 교사들이 학교를 맡아야 하니 더욱 그만 둘 수 없었겠지요 

 

46년도에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기혼이라서 합격 취소가 되고 

서울 군사영어학교에 지원했으나

가족과 떨어져 멀리 가는 걸 모두(부모님과 아내) 반대해서 포기했다는 아버지 말씀도 들었어요

그래서 교직이 운명이었나 하십디다 

 

추가,

1983년 딸이 사는 영국에 여행 오셨던 아버지와 도버 해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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