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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는시간

후회없는 삶

by 그레이스 ~ 2023. 8. 24.

H는 부모의 뜻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고,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퇴사했다.

자녀를 셋 낳았다.

막내딸이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시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얼마 후 시어머니마저 치매에 걸렸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그녀가 병시중을 들었다. 두 번의 상을 치렀다.

이제 나이 예순한 살.

그때 남편이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식구들 바라지를 끝냈는데 덜컥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호스피스 병동의 주치의에게 물었다."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말기 환자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성찰한 글을 읽고...

 

오늘 아침에,

지난 40년 살아온 나날을 되돌려 봅니다.

가난한 집 장남과 결혼해서 처음부터 시어머니의 생활비와 시동생들 뒷바라지를 맡아야 했습니다.

신혼 초부터 몇 년간은 눈물겨운 절약을 했습니다만,

70년대 그 당시에는 대기업마다 폭발적으로 커 나가던 시기여서,

유능하다고 인식이 되면 곧바로 발탁이 되어,

입사동기들보다 승진도 빠르고 월급도 많이 받아서 몇 년 만에 어려운 시기를 넘겼습니다.

 

내 나이 32세쯤 어느 날,

시댁에 생활비 보내면서 저축도 하려면,

하고 싶은 거 참고 알뜰살뜰 살아야 된다는 나에게,

남편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즐기면서 살라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면, 나중에 중년이 되어서,

시댁에 돈 보내느라 하고 싶은 거 못하고 내 인생을 희생했다는 원망을 하게 될 거라며

자기 엄마 자기 동생들 때문에 아내의 삶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합디다.

남편에게 최우선은 아내의 삶이고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우리 가족이라는 말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남편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살아왔고,

모범생 아들들 덕분에 젊은 날이 즐거웠고,

부모님들 긴 병시중 없이 장례를 치른 것도 감사한 일인데,

이 세상 너희들 덕분에 즐거웠다고 마지막 말씀을 해주신 친정아버지의 모습은

자식들에게 영웅처럼 남아서,

나도 저렇게 삶을 마무리하리라~ 결심을 하게 됩디다.

 

시동생들, 조카들까지 공부시키느라 경제적으로 지출도 컸지만,

내 생활에 피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고,

명절과 시댁행사로 고달픈 날도 많았지만,

맏며느리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 때문에 싫은 내색도 못하고, 그렇게 40년이 지났네요.

 

말기암 환자의 삶을 보면서... 한번 더 다짐을 해봅니다.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즐겁게 사는 것.

남편에게 자주 고맙다고 마음을 표시하는 것.

아들에게는 고단할 때 생각나는, 말없이 편히 쉬게 해 주는... 고향 같은 엄마가 되는 것.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소중하게 하루를 보내겠다고...

.......................................................................

 

위의 글은 8 년 전에 썼던 글인데

최근에 말기암 환자 남편을 간호하는 67세의 어느 부인이

자주 처연한 글로 마음을 터 놓더니

병원에서 장례 치를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해서 허둥지둥 남긴 글을 마지막으로 며칠째 소식이 없네요

그리고

며느리가 말기암으로 먼 길 떠났다는 이웃 블로그의 글을 읽고는 

부모의 심정에 감정이입이 되어 남편에게 사연을 전하면서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칠십대의 엄마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감정과는 별개로 

오십대의 자녀 입장을 보면 

자식 뒷바라지도 끝나고 대부분 생활도 안정되고 어느 여자나 편하게 살 시기가 되었는데

그때쯤이면 연세 많으신 부모님 병시중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고 

그게 제일 겁난다고 하더군요 

치매, 말기암, 당뇨병 합병증, 뇌졸증... 돈도 많이 들고 병간호해야 하니

아무래도 자식의 생활리듬이 깨어지잖아요 

수술 후 한 두 달 집에서 간병인을 구하는 경우에도 돈이 많이 들더군요 

 

평소에 관리를 잘해서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자식들 고생 안 시키는 일이라고 했던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소중하게 하루를 보내겠다는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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