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년부터 15 년간은 명품도 많이 사고 사치했었다는 글을 쓰고는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따져본다
(결혼초에는 월급이 적어서) 월급의 절반을 시어머니 생활비로 드리고 살았고
(70년대 중반은 모든 회사들이 번창하던 시기여서 특별 보너스를 자주 받아 생활이 가능했다)
런던 발령받아 나가서 살 때도 매달 송금하고 (시아버지 제사도 모시고 갔다)
돌아오는 해 중역이 되어 생활비도 더 드렸다
두 아들에게 너희들 과외를 할 돈을 할머니 생활비로 드리는 거니까
앞으로 학원 다니거나 개인 과외 없이 엄마가 열심히 공부해서 가르치겠다고 했었다
아이들은 혼자서 공부하면서도 놀랄 만큼 잘했었다
시동생이 사고 쳐서 목돈을 보내야 할 때는
남편은 속상한 중에도 아내에게 미안해서 약간의 위로금을 줬었다
둘째 시동생이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주식에 몰빵하고는
나중에는 주식투자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서 집을 팔아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연락이 왔었다
그 아파트는 우리 돈 4 천만 원 가져가서 샀던 집인데
(시동생 돈 천만 원, 이자 안 받기로 한 우리 돈 사천만 원, 융자 천만 원)
빨리 돈을 벌어서 갚으려고 주식 투자를 했었다나 어쨌다나
결국 한 푼도 받지 못한,
1 억이 넘는 돈이(4천만 + 7천 2백만) 시동생에게 갔었다
너무 미안했던 남편이 나중에 퇴직금 중에서 500 만원을 주면서 기분전환으로 쇼핑을 하라고...
1996 년 그러니까 IMF 사태가 나기 전이다
몇 번 언급했듯이 IMF 사태로 모두 어려웠던 시기에
IMF 직전 1997 년 봄에 외국회사로 옮긴 남편은 연봉과 업무 성과급을 달러로 받게 계약이 되어
순식간에 수입이 많아져서 시어머니 생활비도 매달 300만 원으로 올려 드렸다
2000 년도부터 돌아가신 2012 년 늦가을까지(마지막 일 년은 병원비도 엄청 들었고)
이혼한 시동생네 조카도 우리가 맡아서 중, 고등, 대학 졸업까지 공부시켰다
(남편은 외국회사와 파트너 계약 2 년 후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다)
막내 시동생이 음주운전으로 사고 쳐서
자동차 한 대 변상해 주고 치료비와 위자료까지 줬을 때도
남편이 나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고맙다면서 화병 안 나게 쇼핑이라도 하라며 큰돈을 줬었다
그러니 고가의 쇼핑은 남편이 그 시작을 열어 준 셈이다
2000 년부터 2006 년까지는 블로그를 안 해서 노트북에 남아있는 사진이 별로 없네
레오나드 원피스 중에서 유일하게 무늬가 없는 검정 모직 원피스
레오나드 제품이 아니지만 애용했었던 페라가모 원피스와 가방
큰 사이즈 가방의 안감은 검정 가죽이고 겉 감은 실크(뒤집어서 사용 가능)
오늘 포스팅은
겨울용 숄을 꺼내려고 옷장을 열었다가
해운대에서 환풍시키면서 찍었던 숄과 스카프 사진을 찾아보고 이어서 옷 사진들도 찾아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