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들어 맥을 못 추는 마누라 대신 부엌일을 하시더니, 아예 모든 집안일을 돕자고 작정을 하신 모양이다.
청소를 시작하면 진공소제기는 내가 할게~ 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수시로 오늘 점심은 내가 만들게~
하고는, 재료 준비에서 나중에 치우는 것까지 모든 걸 혼자서 척척이다.
어제 점심은 지난 추석선물로 받은 국수 한 박스가 쌓여있는 걸 보고, 삶아 짜장면을 만들겠다고 하더니,
돼지고기 안심 덩어리 사다 놓은 것과 각종 재료를 볶아서 제법 그럴싸~ 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돼지고기를 살 때, 기름기가 없는 등심이나 안심을 덩어리째 사서,
마파두부와 찹 수이를 만들거나,
각종 야채를 골고루 먹을 수 있는 일본식 쇠고기 전골과 생선조림은 남편도 잘 만드는 품목이다.
이제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날마다 계속해주니까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매일 출근하거나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란다.
허리랑 관절도 안 좋은데 혼자서는 넓은 집 청소하고 관리하기 힘들다면서,
나 죽고 나면 작은 집으로 이사하라고 당부도 하시네.
이틀 전인가~ 낮시간에 세훈이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날 밤에 사고당한 친구의 영안실에 조문을 다녀왔다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목이 메는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고는,
막내 숙모 요즘도 삼성생명 다니냐고~ 묻는다.
왜 무슨 일로?
갑자기 내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은 어떡하냐~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서,
사고가 나면 배당이 높고 사고가 안 나면 낸 돈은 없어지는 생명보험을
10년 정도 들고 싶다는 말을 한다.
연말에 퇴직했다더라는 내 말에,
딴 곳에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곧 진료를 해야 한다며 바쁘게 끊는다.
40대 어느 날,
남편이 회사 설합에 두고 있었던 월급 명세서를 다른 서류들과 한꺼번에 집에 가져왔는데,
해마다 1월에 이해가 안 되는 수상한 지출이 있어서 궁금해서 물었더니,
남편이 생명보험에 들어서 1년에 한 번일 년 치 금액을 한꺼번에 내는 것이었는데,
나한테는 비밀로 해서 거의 10년간 나는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남편은 외국 출장이 많으니... 비행기 사고나 교통사고 등등...
갑자기 사고로 죽고 나면 어린 두 아들과 아내는 어떻게 살아가나~ 그게 큰 걱정이었다고...
친가나 처가 어디에도 도움을 받을 수 없겠고... 보험금 받아서 애들 공부시키고 최소한의 생활은 해라고...
그래서, 사고가 안 나면 보험금 낸 것은 무효가 되고
만약에 사고가 나면 보상금이 큰 보험을 들었단다.
그 당시에는 국내 보험회사에는 그런 상품이 없어서 외국 보험회사에 가입했다는.
사고가 나서 죽는 건 두렵지 않은데, 남은 가족이 어찌살꼬~ 라는 걱정을,
장거리 출장을 갈 때마다 했다는 말에,
가족 걱정하는 남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이 되어 눈물이 쏟아졌었다.
길거리에서 고구마 장사를 해서라도 애들 공부를 시킬 테니까 그런 보험은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만,
집안 형편이 나아지고, 여유가 생기고는 그 보험을 그만뒀나 보다.
젊은 시절에는, 섬세하고, 걱정 많고, 잔소리도 많고... 집안이 어질러졌거나, 눈에 거슬리는 게 보이면,
불같이 화를 내어, 나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야단을 맞는...
남편 시집살이가 많이 고달팠는데,
한편으로는 끔찍이도 가족을 챙기고 위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남편의 유난한 성격을 참아내고 받아줬었다.
세훈이의 전화를 받고 보니, 어쩜 그리도 아버지를 꼭 닮았나~ 싶어서, 할 말을 잃었다.
다정다감해서,
집안의 불편한 부분을 편리하게 고치거나, 퇴근 후 아기들 돌보고 집안일 돕거나,
아내를 위해서라면,
한밤중에 소화제 사러 약국에 가는 수고라도, 얼마든지 하는 건 아버지랑 똑같다.
더불어, 소심하고 예민해서 상처도 잘 받고,
안 해도 될 걱정까지 미리 하느라, 아내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아버지랑 똑같다.
며느리가 나한테 상세한 말을 안 해도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한 곳이나 어려운 일도 감수할 남자.
세훈이를 보면 남편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고,
지금 남편을 보고 있으면 세훈이의 미래가 짐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