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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는시간

커피 마시고 있어요.

by 그레이스 ~ 2018. 6. 21.

아침식사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식탁의자에 앉았는데,

그 사이 남편이 부엌에 들어가서 냄비에 남은 국을 그릇에 옮기려고 하는 걸 봤다.

"그냥 두세요, 곧 치울꺼에요."

"지금 커피 마시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두고 나오는 남편.

 

나, 커피 마시는 중이야~.

이 말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훈이가 윤호보다 조금 더 컸을 무렵, 그러니까 36개월 전후였을 것 같다.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고 잠이 부족하다.

24시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날마다 시간이 부족하고, 피곤이 겹쳐서

하루에 커피를 4~5잔씩 마시던 시절이다.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싱크대 앞에서 일하면서,

세탁기 앞에서 엉키는 빨래를 풀어주면서 커피를 마시는...

옛날 세탁기는 옆에 서서 수시로 엉키는 빨래를 손으로 풀어줘야 하고, 헹굼이 끝나면 옆의 작은 통으로 옮겨

세탁물을 평평하게 한 다음 작은 고무판을 눌러서 탈수를 시켰다.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어서 체중이 50킬로 가까이 빠졌던 시절이다.

 

그렇게 전쟁 같은 시기가 지나고

명훈이가 36개월쯤 되었던 어느 날.

레고를 떼어달라고 온 아들에게,

엄마가 커피를 마시는 중에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부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선선히 알아듣고 기다려주는 아들.

커피를 마신 후 아이 손을 잡고 장난 감방으로 가서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나왔었다.

그 이후로

뭔가 엄마의 도움이 필요해서 부엌으로 달려왔다가,

마침 그 시간에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부엌과 거실의 경계선에 서서 "기다릴게~~~ "하면서 서 있더라.

그 모습과 표정이 어찌나 귀여운지......

남편에게 나의 커피타임을 자랑했었다.

그 이후 오전에 한 번,

내가 커피를 마시는 때 아이에게는 코코아를 타 줘서, 함께 티타임을 가졌었다.

 

영국에서 살던 어느 날.

휴일 대청소를 하느라 남편도 짜증이 났겠지, 잔소리가 좀 심했었다.

그러는 중에,

부엌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타서 식탁에 앉아,

나~ 커피 마시는 중이에요~~~ (조용히 해주세요 라는 무언의 뜻을 포함해서)하며,

웃었더니

남편도 빙그레 웃으면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었다.

남편은 자기도 꼭 한번 그 걸 써보고 싶어서, 훗날 내가 뭔가를 옮겨달라고 부탁을 하니,

나 담배  피우는 중이야~ 기다려, 하더라고

 

커피 마시는 중이라는 말은,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달라는 뜻이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남편도 옛날 생각이 났는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

오, 그렇군요. ㅎㅎ

참 좋은 시간입니다.
모든 일을 딱 접고 잠시 시간을 멈추는 순간.
그 순간이 무척 필요한 때입니다.
저도 커피 한 잔 마시겠습니다.

장미가 지고 있어서 꽃잎을 다 따서 말리고 있습니다.
옆집의 장미와 우리집 장미를 따서 소쿠리에 조금 말려서
포푸리 망이 없어서 양파망을 씻어서 조금 꾸며서
이파리를 넣어서 화장실에 걸었는데 은은한 장미향이 좋습니다.
곧 장미가 질 것 같습니다.

  • 그레이스2018.06.21 14:19

    커피 마시는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즐기고 싶으니까
    내기분을 존중해달라고 젊은 시절에 여러번 부탁했던
    일이어서,금방 생각이 났을 꺼예요
    까다롭게
    받침이 있는 커피잔에
    쿠키나 빵 아니면 다른 간식을 곁들여
    우아하게 마십니다

    어제는 두 며느리가 교대로 병문안 전화를 해서
    기분좋게 만들더니
    오늘은 친구가 친정어머니와 화해했다고
    울먹이면서 소식을 알려주네요
    호텔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날때마다
    마음을 푸시라고 간곡히 말씀드려도 안들으시더니...
    그동안 있었던 긴~사연을 다 듣고,
    내 형제의 일인양 축하해줬어요

  • 키미2018.06.21 15:31 신고

    아, 그때 그 친구분 말씀이시죠.
    참 다행이네요. 화해를 하셨다니 말입니다.
    부모 자식간이라도 앙금이 쌓이면 못 푸는 집이 많더라구요.
    잘 하셨네요.

  • 그레이스2018.06.21 17:30

    작년 10월에 사건이 생겼으니 벌써 8개월이 지났네요.
    그 많은 재산을 전부 받고난 후에는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인사드리러 오지도 않는답니다.
    바로 길건너 아파트에 살면서 한달에 한번도 안온다고...
    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 배신감과 서운함을
    아직도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한마디도 안하시고 만만한 딸에게 푸셨던 것 같아요

  • 여름하늘2018.06.22 09:56 신고
    • 그레이스2018.06.22 11:36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을 호사를 누리는 듯한 기분으로 즐깁니다.
      그래서 예쁜 커피잔도 다양하게 사게 되었고요.
      예쁜 그릇에 간식을 담아 커피와 함께 차려놓으면,
      내 자신이 귀한 대접을 받는 듯 해요.ㅎㅎ

      여름하늘님에게,
      맞은편 자리에 예쁜 잔에 커피를 드리는 걸로 상상해봅니다.
      많이 이야기도 나누고요~^^
  • 그레이스님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주부이지 엄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내자신을 대접해주는 시간이며
    가족도 그러한 엄마를, 아내를 인정해주는
    참 좋은 커피타임입니다

    제목에 '커피 마시고 있어요'
    라고 하셔서
    그자리에 저도 달려가서 앉고 싶어집니다 ㅎ
  • 하늘2018.06.22 18:49 신고

    제가 처음에 영국찻잔 검색하다가 이 방을 알게 됐지 뭡니까... ㅎ
    온라인으로 영국찻잔 하나 둘 사들이다가 봤으니 얼마나 눈이 돌아갔겠어요...^^
    그때만 해도 커피 보다는 홍차를 많이 마실때라
    더욱 영국잔에 흥미가 갔었어요

    "커피 마시고 있어요.."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레이스님의 지혜로움에 감탄합니다...

    • 그레이스2018.06.22 19:41

      소품들 카테고리에서 찾아보니,
      내가 가진 그릇들을 소개한 게 2009년이군요.
      서울에서 살고있는 젊은 엄마들과 본챠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가진 그릇들을 사진으로 보여주겠다고 하고,
      시작했던 그릇공개였어요.
      막상 꺼내보니 상당히 많습디다.ㅎㅎ

      커피타임 덕분에 조금 더 지나서
      하루에 두번 아들과 규칙적인 차마시는 시간을 가졌어요.
      받침이 있는 잔에 코코아를 타서 주면,
      마시다가 절반정도 남으면 찻잔을 들고 빙글빙글 돌려서
      가라앉은 코코아를 다시 섞어서 마시는 게 정말 귀여웠어요.

  • christine2018.06.26 23:02 신고

    영국식 티타임~~ 정말 생활의 활력소예용~~ 누구에게도 방해받지않고싶은~~~ ㅎㅎ

    • 그레이스2018.06.27 07:57

      아이가 유치원 마치고 오면 티타임을 가지는데,
      명훈이 세훈이는 간식과 코코아(혹은 쥬스)를 주고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물어보는 시간이 참으로 좋았어요.
      그게 학교에 들어가고도 계속 이어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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