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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흙수저, 그 남자의 삶.

by 그레이스 ~ 2019. 9. 10.

 

 

흙수저의 대표격인 남편에 대한 글입니다.

2008년 4월 19일에 쓴 글을 옮겨 왔어요.

........................................................................

 

오늘 아침,

수월성 교육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으면서,남편의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대학생 과외가 금지됐던 세대였다면,

대학은 꿈도 못 꿨을 그.

고등학교 2학년 12월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에서 고 3이 되었으니...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갈 생각은 접고 취직하라고 당부하셨다는 어머니.

담임선생님 소개로,

같은반의 부유한 친구 공부 파트너가 되어주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친구와 숙식을 함께 한 고 3 일년.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온갖 위함을 받으며 수험생 노릇을 하는데,남의 집에서 생활이라니...)

그리고 대학 4년.

가난한 학생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뿐이다.

본인의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이고, 집안에 도움도 줘야 했으니...

하루를 48시간으로 쪼개어 사는 방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겠지.

 

(런던에서 직장 다니던 큰아들이 아버지께  가장 가고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프랑스 남부라고 해서,2008년 부활절 휴가 일주일간 큰아들과 여행했었다)

아를르에서 고흐의 흔적을 찾아 다니고 그림을 보면서,

간간히 옛 이야기를...

암울했던 청년시절에

불우한 환경을 겪어낸 화가들과 그 작품,

그리고 음악이 자신을 지탱하게 해준 위안이었다는... 말을 하더니,

그날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긴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불행한 가정환경에도 뛰어난 선생님들 덕분에 반듯한 사고와 야망을 키웠고,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었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와

평준화 고등학교였다면 학교 공부만으로 어떻게 서울대를 갔겠냐고?

나는 수월성교육의 혜택을 받았다는 말도 하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여러번 자살을 생각했었다는 사연도 털어 놓으셨다.

스무한살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하고,

무작정 인천부두에서 출발한 후 큰 섬에서 쪽배를 타고 어느 작은 섬으로 갔었는데,

바닷가를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조개를 줍던 할머니가

자기집에 같이 가자고 하시더란다.

다 쓰러질 듯한 움막.

촛불이나 호롱불도 없고,냄비와 최소한의 그릇들.

밥과 조개에 소금을 넣어 끓인 국을 할머니와 먹으면서,

할머니께서 물으시면 답하고...

그러다가 들은 그 할머니의 사연.

 

아들 삼형제.

큰아들과 둘째는 6.25때 군인으로 죽고,

셋째는 순경으로 공비 토벌때 죽었다.

자식 목숨값으로 살기 싫다고 국가 유공자연금을 거부했단다.

아무도 모르게 죽으려고 섬으로 왔는데,

자살하는 건 자식 앞세운 죄값이 아닌 것 같아서,

최소한의 연명으로 살다가 죽어지기를 기다린다고 하시더란다.

할머니께서 자기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서늘한 눈빛에서 죽으러 온 젊은이인줄 한눈에 알아봤다며,

자네의 사연이 내 삶보다 더 기구하지는 않을테니 돌아가서 살아라~ 하시더라는.

 

그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가장 큰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슬기롭게 넘겨야 하는지를...덧붙여 하시더라구.

그날밤 나는...

없는 듯 뒤에서 듣고 있었고.

 

스무살 이후 사십년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으로 매 순간을 살아 온,

그 삶의 기록들을 본다면,

이 남자가,

내 남편이 아니어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어도 존경했을 것 같다.

 

                                         2008년 4월 19일.

...........................................................................

 

결혼 초에

남편이 살아 온 사연을 듣고,

앞으로 살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고통을 함께 감당하고,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말만 하겠다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위로가 되는 아내가 겠다고 결심했었다.

 

그 결심 때문에

화가나면 욱하는 고함도,

의논없이 자기 고집대로 결정하는 것도,

비위 맞추고, 감당하면서 45년째 살고있다.

 

 

 

  • 휼륭하십니다
    욱하는것 참고
    존경심으로 사시는것
    그레이스님의 덕목이 느껴집니다
    남편을 존경할수 있서야
    아내의 자리는 빛이나는거 갔습니다

    아들셋을 앞세우구
    시셨든 그할머니 성인 이시지 싶습니다

    답글
    • 그레이스2019.09.10 22:23

      평소에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하는 사람이니
      화가 났을 때는 내가 참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자다가 남편을 깨워도
      어떤 심부름을 부탁해도
      한밤중에 일어나서 나가는 남편이예요
      그만큼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니
      나도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됩디다

      그 할머니는 정말 강인한 분이셨다고 합디다
      밥도 쌀이 아니더래요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음식으로
      허기를 면할 정도로 먹고 하루종일 일하면서
      하루씩 넘기는 것 같았다고... 기억합디다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말라고 하고요

  • 키미2019.09.11 21:50 신고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섬까지 가셨을까요...
    그 심정이 참으로 애달파 울컥합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 옛이야기 하시며 지내시니 얼마나 좋은지..
    제가 다 마음이 따스합니다.

    답글
    • 그레이스2019.09.12 07:35

      20대 10년을 죽을 힘을 다해서 살았던 사람이라서,
      평상시의 모습과 달리 화가 났을 때는 폭발을 하는...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어요.
      나는 화를 잘 안내고
      또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을 생각해서 내색을 별로 안하는 성격이거던요.
      대꾸할수도 없고...젊은시절에 몰래 뒷베란다에 나가서 많이 울었어요.

  • 하늘2019.09.11 21:51 신고

    삶은 돌아보면 모두가 각각의 소설이 되어 있더라구요
    특히 격동의 세월을 보낸 그 세대는 더할 거구요
    그레이스님네를 보면 그런 세월을 잘 이겨내고 성공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어요
    가장 중요한 심성이 올바라서 일까요? ...
    보며 느끼는 점도 많고 배울게 많아요

    답글
    • 그레이스2019.09.12 07:52

      남편의 일방적인 애정공세에 넘어가서 결혼을 했으니,
      처음에는 좀 도도하게 굴었는데,
      남편을 제대로 알고는 두 달도 못넘기고 무수리가 되어버렸어요.
      좋은 조력자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도 하고요.

      할아버지 할머니 다 계시는 집에서 자라서,
      내가 불편하고 힘들어도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서 수시로 주의를 받고 컸습니다.
      스무살이 넘도록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몸에 베여서
      자기절제를 잘 합니다.
      화가 나고 남편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도,
      다툼을 하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더랬어요.
      하루 이틀 지나고 감정이 풀어졌을 때 잘못과 문제점을 지적했어요.

  • 여름하늘2019.09.12 00:00 신고

    21살 자살을 결심하고 어느작은 섬으로 갔는데....
    정말 영화의 한장면을 듣는듯합니다
    그러셨군요....
    숙연해 집니다
    그리고 결혼초에 이러이러한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레이스님
    그러한 그레이스님이 계셔서
    오늘의 훌륭한 가정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답글
    • 그레이스2019.09.12 08:04

      스무살 시절의 남편을 생각하면 가여워서 마음이 아릿합니다.

      우리는 성격적으로 극과 극이 만난 케이스예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단점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할만한 남자라는 생각에는,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남편에 대한 존경심에
      시어머니와 시동생들 뒷바라지와 사고 수습들,
      그리고 남편의 불같은 성격과 고집을,
      감당하고 살았어요.

  • 참으로 그레이스님과 남편분이 훌륭하십니다. 저는 그레이스님의 블로그에 와서 읽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댓글을 안달수가 없군요.
    두 분 모두 타인의 모범이 되며 남편분이 그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쪼개서 썼을 지
    상상이 됩니다.
    감정이입이 되는 글입니다. 좋은 글, 역경을 이겨낸 인생글 잘 읽었습니다.
    그 할머니도 참 안타깝습니다.

    답글
    • 그레이스2019.09.12 09:36

      댓글로 인사 남겨서,반갑고 고마워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열심히...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만,
      세세히 살펴보면
      지적당할 잘못도 단점도 많은 사람이예요.
      칠십을 바라보는 싯점에서,
      살아 온 세월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마음으로, 옛 글을 다시 읽어봤어요.

  • christine2019.09.12 11:54 신고

    불우한 환경을 겪고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신건 정말 인간승리시네용~

    그레이스 남편분이 존경스러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희생하는 모습이예용~ 물론 그 정도 직위에 계셨고 연세가 있으심 당연히 고집도 있으시공 타협할수없는 몬가가 다 있을거예용 그걸 옆예서 잘 지켜보시는 그레이스님또한 박수~ 짝짝짝!! 두분이 지금 자녀들을 배려하는 모습을보면 저도 훗날 그런 부모가 되공 싶어용~

    답글
    • 그레이스2019.09.12 13:21

      인터넷상으로는,
      나이가 많이 어린 사람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도 반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해서,
      그 게 생각날때는 경어로 썼다가 잊어버리면 반말로 썼다가
      윤정씨에게 쓰는 답글은 때마다 오락가락 한다.
      그냥 편하게 쓸게~

      성공한 이후에도 한결 같은 마음이었을까?
      묻어 둔 비밀을 하나 공개할게.
      사장이 되고나서 연봉이 놀랄만큼 높아지니까, 사람이 좀 변하더라.
      항상 고마워하고 존중했던 아내를 무시하는 듯 말하면서,
      남편을 받들어 모시라 하고,
      나와 상의도 없이 시동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때마다 5천만원 1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당당히 지시하듯이 내일 입금 시켜주라고 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
      가족들 위에 군림하는 이유를 알겠더라.

      지금은 너무나 시골 할아버지 같아서
      자기가 사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는지 그것도 잊어버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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